Application kim.
Artist statement
딱히 요즘은 말하고싶은 내용이 없는 것 같아요. 저는 22살 평범한 대학생이고. 외국에서 살다온 것도 아니고, 세기의 사랑을 경험한 적도 없고, 크게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에게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굳이 무언가를 내 것인 것처럼 끌어와서 작업으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여러모로 살짝 갈피를 못잡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입시미술을 오래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잘 그리는 행위에 대한 열등감, 두려움도 있습니다. 미술이라는 장르는 내가 너무 너무 사랑하는 것이지만 좋아하는 것 앞에서 내 능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자꾸 웅크려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다가 결론적으로 내가 왜 그림을 그리느냐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잘 모르는, 내 생각이 아닌 이슈를 작업으로 하고싶지 않아서, 저는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죽고싶지는 않지만 애초에 처음부터 내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을 종종하곤 하는데, 이 생각과 반대되어
그냥 내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고싶어서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도해도>작업을 하면서 내내 내가 살아있는 것을 느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회화 작업이라기보단 개인적으로 행위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그림의 소재인 ‘장기’가 추상적으로 그려진 이유는 제 몸이 움직이는걸 느끼면서 그렸기 때문입니다. 직접 몸을 만져보면서 그리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형태가 시시때때로 변했기 때문에
레이어를 계속 겹쳐그렸습니다. 너무 레이어가 많아서 징그럽고, 주제부가 없다는 느낌도 들고, 시각적으로 예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그림이 살아 꿈틀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아있음을 증명하고자 그렸기 때문에 감사하게도 그림도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좀 애증의 관계입니다.
-2022.11.10
최근 부모님의 보살핌을 떠나 서울의 기숙사에서 혼자 생활하게 되면서 스스로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식사 시간에 맞춰 음식을 챙겨 먹어야 하는 것, 하루에 물을 7잔 정도 마셔야 하는 것, 필요에 따라서 영양제를 챙겨 먹어야 하는 행위들이 너무 귀찮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음식을 섭취하고 소화를 시키고 그것을 배설하는 단계까지가 버겁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음식을 먹고 소화, 배설하는 과정이 인간이라면 별다른 노력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최근 그 과정 또한 신체적으로 많은 신경을 써야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잘 싸기 위해 잘 먹는 것’이 내 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음식을 먹고 소화하는 과정과 배설하는 과정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다.
사실 음식을 먹고 소화를 시켜 배설물을 만드는 것은 인간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너무나 친숙한 발생이다. 이것을 객관화해보고 싶었다. <도해도 시리즈>는 인간의 소화 장기를 그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인간의 몸’과 소화 장기를 따로 떨어뜨려보고자했다. 인간의 몸이 아닌 음식을 부수고 영양을 흡수하고 찌꺼기를 배출하는 ‘운동적인 기관’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다. 작업을 위해 소화장기에 대해 공부를 해보았는데 내 몸의 일부인데도 불구하고 이름과 외관 모두 낯설었다. 관심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즉석밥에 인스턴트 반찬 하나로만 끼니를 때울 때가 많았던, 여러 가지 변명을 대며 나의 건강에 관심을 쏟지 않았던 내 모습을 반성하는 것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2021.12.24
‘소화’라는 것은 ‘살아있는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소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죽지 않기 위해 음식을 챙겨 먹는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에서는 좋은 음식, 영양소를 따로 섭취하기도 한다. 소화를 잘 해내는 것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건강하게 잘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또한 ‘소화’가 우리가 예술을 하는 태도와 아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배워 받아들이면 그것을 스스로 사유한 다음 그 과정에서 생각했던 것을 세상에 나타내려고 한다. 그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고<input>, 음미하고 세상에 다시 내보내는 것<output>이 소화하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흔히들 ‘소화’는 자연적인 것이고 ‘예술’은 의도적인 것이라고 구분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둘 다 손과 장기라는 신체에서 시작된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고 먹는 것이 바로 나: 소화와 사고의 연결성>은 설치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사진으로 촬영한 아카이빙 작업이다. ‘소화’와 ‘우리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비슷하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만드는 것은 이견 없이 예술이라고 인정한다. 이런 생각에 더해, 나는 특별한 무언가를 먹고, 적절히 씹고 운동을 해서 장으로 배출물을 싼다는 것도 예술로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손으로 무언가를 인공적으로 만든 것을 이견 없이 예술로 인정한다면 같은 몸의 일부인 장으로 만든 것도 작품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을 한다는 행위의 주체가 같지 않나.
보통 똥은 예술로 보지 않는 이유는 배설은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으로 배설물을 만드는 과정이 정말 자연스러운 과정인지 고민해보게 되었다.
소화 장기를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적절한 음식과 영양, 운동이 필요하다. 이는 100퍼센트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소화과정과 우리가 예술창작을 하는 과정이 비슷하다는 것을 실험해보았다. 먼저 내가 최근에 먹은 음식들을 이용해 물감을 만들어보았다. (2021.12.5~ 2021.12.9)
음식들을 이빨로 씹는 것처럼 가위로 잘게 자르고 소화과정과 비슷하도록 30분에서 40분정도 끓여 고아냈다. 이때 린넨 천도 같이 넣어 음식의 색이 천에 스며들도록 염색되도록 하였다.
소장, 대장에서 음식물을 더 잘게 분해하는 것처럼 원두 블라인더를 이용해서 고아낸 것들을 갈아냈다. 입자가 작고 부드러운 액체가 나왔다. 이 액체들을 서로 섞어서 총 8가지의 색상을 만들어내 보았다. 배출물에 물풀과 겔 미디엄을 섞어 물감으로 직접 사용해 보았다.
천연염색을 시킨 천은 스타킹에 넣고 고무줄로 묶어서 소화 장기로 표현해 보았다. 작업의 초기 모습은 천연염색을 하는 것에서 착안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소화과정과 장기>(2021)이다. 작품 부분 부분에 보이는 붉은색과 고동색 부분들은 염색된 천과 음식으로 만들어진 물감이 스타깅에 베어들어간 것으로 냄새도
난다. 위장, 소장, 대장의 모습들을 고무줄로 묶어 표현하였다.
손도 장기의 일부고 소화기관도 장기의 일부이다. 예술 작품(회화, 조각, 소설, 시 등)과 배설물이라는 각각의 결과물은 탄생 의도는 다를 지 몰라도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소화와 배설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연히 자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자연적이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 감정표현 또한 마찬가지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음식을 먹고 소화, 배설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신체적 욕구에 기반한 것이고 정말 당연한 섭리이지만 그 과정을 건강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2021.12.24
<변비>(2021)을 제작하며,
작품에서 말하는 변비는 신체적인 소화과정에서의 변비가 아니라 예술의 과정에서의 변비를 말한다. 건강하지 못하고 어지러웠던 그 당시의 심리상태는 작품을 만드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고, 결국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보고 싶지 않고, 보면 스트레스를 받던 작품에 <변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우리는 거대한 필터와 같은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한 필터가 되어야지 건강한 배설물, 작업을 만들어낼 수 있다. 건강한 필터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사고하고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글 검색이나 핀터레스트를 찾아보면 비슷한 주제라도 수천, 수만 가지의 이미지가 나올 정도로 우리는 이미지가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렇게 이미지가 많은 세상에서 내가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림은 나를 표현하고자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림이라는 매체를 사용해 나를 표현해 봤자 그것을 봐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가 의문이다. 공감해 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자기만족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기는 이제는 지난 것 같다. 전문적인 필드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중인데 타인이 내 그림을 볼 때 순수한 감상이 아니라 나노 단위로 품평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림을 즐기면서 그리지 못하게 된 건 오래되었다. 현재 나는 나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남들의 니즈에 중점을 두게 되는 것 같다. 내 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작가라는 말은 너무나 과분하다. 내 작업을 끊임없이 남들에게 증명, 어필, 지원해야 한다는 현실과 미래가 슬프다. 그렇지만 그건 작가의 필수 의무이기 때문에 그걸 회피하는 것은 작가의 자질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 작가의 자질이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슬럼프는 아니다. 왜냐하면 슬럼프가 올 정도로 많은 작업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방향성을 확실히 정해야겠다는
결정이 필요한 것 같다.
-11월 1일의 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