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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자리

김지원서, 2024, Sound Installation, 20min 30sec. (script)

History,  His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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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재순 할머니)

할머니는, 김천 감천면 어느 촌 거기서 살았어.

우리 엄마 등에 업혀 저기 세 살 때 열차 타고 함흥, 응. 함경남도 함흥서 아홉 살까지 살았어. 함흥이 거기가... 봉께... 뭐 저 잊어묵었다.

거기서 해방되고 나서 이북에서 이남으로 넘어오는데, 피난 오는 거처럼 그렇게 넘어왔어.

중간에 할머니가 외나무다리를 넘어와.

그때가 해가 넘어오는 때였는데, 할머니가 아홉 살 때 넘어왔어.

해 넘어오는 그 시기인데, 그러니까 서쪽에서 해가 넘어오는데 저녁노을이 파랗게 있을 때 그기 아홉 살 먹은 내도 억수로 서글프더라고.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아버지 저 외나무다리를 건너가야 되는데, 건너가는 건 괜찮은데, 저 붉은 빛을 보니까 서글프고, 오늘 밤에는 우리가 어디서 잘꼬.”라고 했지.

이북서 몰래 막 소련군들이 8.15 해방되고 난 뒤에 이북에 있는 사람들 다 모두 자기 고향을 찾아가는데

우리도 우리 아부지하고 우리 집 식구 엄마하고 오빠하고 그래 오는데

하여튼 간에 한 달 걸렸어. 함흥서 흥남까지는 기차를 타고 가는데 흥남에서부터는 서울까지는 걸어서 한 달이 걸렸는기라.

사료원에서 외나무 다리 건너오면서 저녁 노을을 봉께 아홉 살 먹은 내가 왜 이렇게 슬픈지 몰라.

디게 서글프데?

내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우리 아부지한테 우리 오늘 저녁에 어디서 자는고 물어보니께

아 빈집에 들어가 가지고 아무 동네서 자면 된다고 그래.

그때는 기와집이 별로 없고 잘 사는 사람만 기와집이 있지 전치 초가집이고 그래.

어느 초가집에 가니까 그 집이 인심이 좋아가지고 밥을 줘서 먹고

밤에 자고 나올라카니께 온 동네가 막 새끼 줄을 감아놔가지고 못 댕긴다, 이러는기라.

왜 못 댕기냐 물어본께

호열자.

지금은 말하면 그게 이리. 설사병 인기라.

호열자. 전염병이 있어가지고 못댕긴다 그러대.

아유 그럼 서울은 언제까지 가겠노, 이남에는 언제까지 가겠노. 

하룻밤 자고난께 설사를해서 그렇지 호열자는 아니다. 이러드라고.

 

소 달구지 있잖아 그제?

소 달구지가 지나가니께 여럿이 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 어린 애들 좀 태워가지고 가면 안되겠나? 이러드라고

이 할머니가 소 달구지타고 한번 걸어간 적이 있어.

나하고, 아부지, 엄마, 오빠, 그리고 정서라 하는 여동생이 어마이 등어리에 업혀가지고 피난 왔지.

피난 온 사람들이 많았어.

얼마를 걸어가다가 사람이 뭉쳐가지고 못 건너오고 모두 있대?

왜 그러느냐 물어보니까 임진강이 눈 앞에 보이는데 임진강을 못 건너고 있다.

소련, 러시아군이 지키고 있어 가지고 못 건너간다, 이러대.

그때 나는 아홉 살이고 우리 오빠는 열다섯 살이라.

오빠가 소련군한테 가 가지고 뭐라 뭐라고 말을 하더니만 건너가자 이러는데.

임진강 철교를 건너가는데 허연 구멍이 뻐끔 뻐끔 뚫려있고 그 밑으로 시커먼 물 흘러가는게 보이잖아.

사다리 같이 그랬어.

할머니가 그 다리를 건너오는데 그렇게 애를 먹었는기라.

한 발자국 띠면 빠질까, 한 발자국 띠면 빠질까 이러는데

앞에 우리 엄마가 가는데 뭣이 풍-덩 하면서 소리가 나는 바람에 나는 우리 아버지를 꽉 붙들었지.

“엄마 무엇이라?” 하니께 느그 아버지 구두를 떨어트린께 강물에 떨어졌다 이러는기라.

임진강을 건너와가지고 우리 아버지가 “아이고 이제 경상도 가겠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남한 땅이다. 마음 놓고 가자” 카면서 얼매나 걸었다고.

걷다가 오르막길 즈음에 다다르니까 사람이 바글바글하면서 천지 흰 가루를 덮어쓰고 있어.

이북에서 온 사람들 전치 병을 가지고 들어온다고 약을 친 거야.

몸에 이도 있고 그러니께 소독하는 모양 인기라. 그걸로 소독하고, 주사 두 대 놓아주고 그리고 수용소 매로 우리가 막 몰려가지고 가는데. 일본 사람 방은 다대미 방이라. 짚으로 엮어가지고 침대 긑이 만들어가지고

복판에는 큰 화로처럼 그 뭐라카노 화로 말고. 기억이 안 난다.

그냥 생각을 해봐.

화로같이 장작불처럼 해 가지고 하니까 다대미 방이 춥지를 않애.

지금은 통조림이 둥글지만은 예전에는 통조림이 납닥했어. 납닥한 통조림을 하나씩 나눠주면은 거기에 이제 콩도 있고 고기도 있고 이래. 

서울서 수용소에서 이틀 밤 있다가, 모두 자기 고향 갈 사람 있으면 차표를 끊어주대?

서울서 김천까지 오는 차가 하루가 걸린기라. 완행 열차라서 조금 갔다가 쉬고 조금 갔다가 쉬고. 하루가 걸린 거 같아. 그래도 아홉 살 때라 차멀미는 안 했어.

김천에 딱 오니께 우리 고모가 기다리고 있더라고.

할머니 이야기 디게 길지?

 

우리 고모 집에 방 두 칸이 있는데 작은 방에서 살다가 한 달 즈음 있으니까 아부지가 우리 집에 가자. 이러더라고

아부지 따라 갔더니만, 할머니가 거기서 십일 년을 살다가 결혼해서 대구로 왔어.

방 두 칸 정지(부엌) 두 칸. 골방 하나. 마당은 굉장히 넓어. 넓어가지고 옥수수 숨구고 배추도 숨구고.

화장실. 지금은 화장실이지만 그때는 통시라고 했어. 농촌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우리 집에 와 가지고.

지금은 화장실 청소할라고 하면은 우리가 돈을 줘야 하는데 그때는 우리가 돈을 받았어. 그 사람들 화장실에서 변을 가져가면은 네모난 통이 있는데 가져가면 한 통에 얼마 씩 주고 그랬지.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일부로 물을 붓는 사람들도 있고 그랬거든.

할머니가 아홉 살에 김천에 와 가지고 스물 한 살에 결혼을 했다.

그 중간에, 그 당시에는 공부도 옳게 못하고 천자문. 하늘천따지 그 천자문을 모두 많이 배웠어. 할머니도 그 당시에 참 이북에 있으면서도 우리 아부지가 왜놈 학교는 안보낸다고 그러는기라. 우리 오빠도 안 가고. 그래서 한문. 하늘천따지 그 한문만 배웠는기라. 이제 김천 와 가지고 초등학교 2학년 들어가 가지고 공부했다.

지금의 수학을 갖다가 옛날에는 셈번 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회생활. 산수 했지.

공부도 잘못하고 그러고 있다가 13살이 됐을 때 4년 있다가 6.25사변이 터지는 바람에 피난 나온다고 그랬지. 그때 나는 열세 살 먹고 내 동생은 그때 나보다 9살 적고 우리 오빠는 6살은 많고 그랬는데. 아이고 피난가는기 그게 부끄러운 일인데 나는 그게 그렇게 놀러가는 줄 알고 기분좋게 뛰어가다가 인민군들 차가 앞에 지나가는 바람에 마 중지를 했어.

대구 온다고 낙동강을 지나가는데, 앞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왜 돌아오느냐고 물어보니께 낙동강변에는 지금 사람 시신이 즐비하게 있다고 그래.

가지를 못한다고. 잘못하다가는 우리 국군, 그러니까 아군하고 인민군하고 서로 싸우는 도중에 총 맞아 죽는다고 가지마라 그러대.

뒤돌아와가지고 감천 내에 움막을 하나 지어가지고 살았지. 그때는 호줄기하는 비행기가, 지나가면 소리가 나는 게 있고, 비 이십구 하는 거의 소리도 내가 들었거든? 비 이십구는 공중에 있어가지고 비행기같은게 뜨면은 맞춰가 터뜨려버리고. 호줄기 같은거는 지나가고나면 또 소리가 나고, 정찰기는 높이 서 가지고 밤새도록 떠가지고 정찰을 하는기라.

우리는 냇가에서 막을 짓고 살다보니까 호줄기가 혹시 인민군들 숨켜놨는가 싶어가지고 우리 아버지가 안되겠다, 김천으로 돌아가자 그랬어.

돌아가는데 폭격기가 오는 바람에 나는 땅에 딱 엎드려있었고 또 따른 사람들은 어디에 엎드려있었나 몰라. 그런데 우리 오빠가 갔는 그 장소에서 막 불이, 불꽃이 올라오는기라.

그래노니까 우리랑 같이 있는 사람들이 “재준이는 죽었다” 우리 오빠 이름이 재준이거든.

“재준이는 폭격 맞아 죽었다”

우리 엄마는 울고 막 그랬거든. 그런데 오빠가 불 속에서 나와.

어찌 그렇게 살아서 나오노 이러니까 거기 인민군들이 있었는데, 인민군들이 있어서 폭격을 했는데 마침 인민군들은 안 맞고 엉뚱한데 맞았다 그래. 이 인민군들이 하는 말이, 딴 건 다 놔두고 빤스 벗어달라고 그러더라 캐. 그래가지고 빤스 벗어주고 오느라 늦었다, 이러더라고.

김천까지, 우리 집까지 가 가지고 땅굴을 파가지고 뒤에 산 웅더기에 땅굴 파가지고 우리 오빠를 숨켜놨어. 나이가 한 열여섯, 열일곱 정도 되면은 무조건하고 전쟁터에 가야했거든.

안 보면 모르겠는데 보면 무조건 데리고 가. 인민군은 인민군대로 끌고 가고, 이남 사람은 이남 사람대로 끌고 전선에 보내는기라.

음력으로 8월 15일 3일 앞두고 정찰기가 하루 종일 돌더니만 나중에는 내가 다니는 중앙 국민학교 정문 옆에 군청. 군청 앞에 중계소. 거기 때려 가지고 인민군들이 거기 있다고 천지 불이 나는데, 내가 움막 지어서 살면서 내다 보니께 초등학교, 군청, 시청 그런 게 삼 사일 동안 불에 타더라고.

집에 쌀이 없으면은 빈집에 들어가서 쌀 있으면 가져다가 먹고. 그때는 막 니꺼 내꺼가 없었어. 모두 피난 가고 없어가지고 빈집이 많았거든.

그때는 양식이 없어가지고 피난 시대고, 전쟁 시대고 그래서 쑥도 길러서 캐 먹고.

한삼 년을 그랬는기라.

공부도 내가 사학년인가 오학년인가 그랬는데 교실이 없어가지고 운동장에서 공부를 하다가 비가 오면은 몬하고 겨울엔 추워서 몬하고. 공부도 옳게 못했어.

그래도 그 당시에 부잣집 애들, 아부지 어마이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안 죽은 집 사람들은 그때도 참고서 같은게 있었는기라. 참고서 사가지고 공부도 하고 그랬지.

우리 같은 사람들은 6.25사변 때문에 아무것도 없어가지고 그런 것도 몰라.

할머니는 열여섯 살 때 ymca 지금도 있다. 거기 정용문 선생님이라고 밤 야간부가 있다 그래가지고 친구하고 가 가지고 한 석 달을 공부했어.

그 당시에는 한문을 많이 배웠는데 지금은 한문 하나도 몰라. 내 이름도 옳게 몰라. 알랑가.

ymca 다니다가 6.25 사변때 우리 엄마 임신 해가지고 11월달에 낳았는게 이름이 재설인데,

가가 6.25사변때 낳았응께 내가 열다섯, 열여섯 쯤 돼었을 때 고게 한 다섯 살쯤 됐었는데

홍역하다가 고만에 죽어뿌렀어. 그 바람에 내가 고마 ymca다니던 것도 치워 뿌리고.

그 동생 죽고 나서는 그렇게 내 마음이 아파 가지고, 그래. 마음에 막 우울증 걸려가지고.

동생 붙들고 마이 울었는기라.

ymca 다시 가니까 그 정용문 선생님이 노래도 ‘아가야 나오너라. 달 마중 가자...’

이것도 천천히 하면 다 부를텐데 지금 보니 모르겠다. 그 노래도 정용문 선생님이 지은 건데.

정용문 선생님이 그때는 암인지 모르지. 병 걸려 가지고 죽게 되어 가지고 나도 ymca 나왔다.

그리고 스무 살 되어 가지고 스물 한 살 되어 가지고 할머니가 결혼하게 되었는기라.

그 이야기는 다음에 할게.

# 2

내가 사우디도 가고 월남도 갔어. 돈이 없어 가지고. 저 저 저 총알 받이로 갔어. 진짜.

19살에. 왜냐면 집에 와봐야 농사도 없고, 살 길이 없응께. 나뭇짐 져 봤자 죽는 게 낫다,

이래 가지고 갔어. 월남 가서 추라이 하고, 다낭으로 해서 거기서 쪼깨 벌었는데 그거 갖고 안돼.

돈 마이 받아봐야 뭐 삼천 얼마씩 받고, 아이다 싶어서 또 다시 사우디로 갔지.

사우디가서 쪼금 벌어 가지고.

쪼금 벌어 가지고 이제 뭐 삼성에 쪼금 있다가 롯데 자재에 있다가 삼성 자재에 있다가 집을 어떻게 해 가지고 아파트가 보자 두 채... 세 채. 세 채 있지.

엄청 대단한 게 아니라, 벌라고 노력 했으니께.

지금 이제 한 달에 나오는 게 삼백만 원 나오는데, 마누라가 그 저 요양 병원에 있어.

150 만원 주고. 우리 아들한테 또 62 만원 준다.

그래서 내가 또 덕산 아파트 도시락 배달하면 29 만원을 줘. 한 달에.

그걸 안 해도 되는데, 빛도 없고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가만히 있으니까 낙이 없어.

그래서 뭐가 낙이냐... 지금 이렇게 생각을 해보니께,

사람이 태어나서, 부모가. 짝을 지어주는거!

우리 딸래미가 마흔 두 살인데 간호사라. 시집을 못 갔어.

내 말을 안들응께. 우리 같으면 웬만하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

물론 똑똑한 사람 있으면 좋지. 근데 이렇게 살아보면은 거의 다 맞추고 살아야 해. 부부는 서로가 한쪽이 양보하고 서로 맞춰가면서 살아야 해, 그걸 모르고 자기 마음에 드는 거는 없지 세상에. 들 수도 없고. 부부가 살아도? 마음에 한두 번 통하지, 일 년 열 두 달 싸움도 하고.

있어. 에로 사항이.

부모가 자식을, 지금 생각해보면 짝을 지어줘야 해.

우리 엄마가 나보다 잘살았다 하는 거는, 6남매를 낳아서 시집, 장가를 다 보냈어.

그랬으면 많이 해주는 거 없고 맨몸으로 가서 다 사는거여.

그래서 보니까 내가 인생을 잘 못 살았구나 싶어.

내가 이 재산을 냄겨 줄 사람이 없어.

하나는 정신 장애 3급인데 그것도 그렇지, 딸래미 하나 있는 거 그 시집도 안 갔는데 누구한테 가?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봉께, 나는... 우리 엄마보다 인생을 잘 못살았다.

돈은 많이 벌었긴 하지만 인생은 잘 못 살았다.

우리 아들래미 장애 3급. 그거 돈 한 푼도 안 나와. 뭐시기 재산이 있기 때문에.

마누라 150 주고, 아들한테 62 만원 주고, 나머지 내가 쓰는 거야.

나머지 내가 쓰는데 좀 모자라니께 도시락 배달하믄 한 달에 29 만원 나와.

내가 지금 80이야.

마누라 죽는 거까지 내가 책임져야지. 그거까지 생각하믄 골치 아파.

#3 ( 훈수 두지 마세요!)

-유튜브에 보면 장기 두는 법 다 나오겠지만, 실제로 뜨는 사람들은 옛날에는 참 많았어요.

젊은 사람들도 그랬는데 지금은 젊은 사람들은 뜨질 않고. 이런 거 안하죠. 나이 드신 분들이나 이런 거 하시지.

- 여기 자주 오세요?

-아 저는 자주 오는 건 아니고, 근데 제가 한 번씩 종로에 나와요. 

종로에 나오면 기분이 참 좋아요. 

-맞아요.

-저기 인왕산 갔다가 저~기 거쳐 거쳐서 막걸리도 한 잔 하고. 허허허. 그러다 여길 왔거든요.

항상 오면 이렇게 거쳐 가요. 

-저도 어제 장기 판이랑 말이랑 다 샀어요. 

-그래요?

-네 집에서 연습하다가 또 오려구요.

-저도 집에 장기는 있어요. 아들래미하고 뜨긴해요. 고스돕도 치고 그러는데, 참 재밌습니다 이게.

-저 이제 매 주 오려구요. 

-장기 처음부터 뜨 는걸 보세요. 그러면은, 처음엔 똑같애.

움직이는 거 다 똑같애. 그런데 이제 이거 죽고, 저거 죽고 있잖아요? 그때가 중요한 거야.

어떻게 해 가지고 점령을 하느냐. 아 이게 머리 싸움. 머리 싸움.

장기도 어려워요. 근데 처음은 다 똑같애. 

그러다 하나 잡히고 하나 잡고, 잡고 잡히고 이러다 보면은 그때부터 이제 묘수가 나오는거야.

-캬. 묘수.

-그래서 훈수 두지 마라고 하는 거에요. 옆에 계신 분들 있잖아요, 다 이 고수잖아요.

보는 눈이 틀려. 직접 뜨는 사람하고 옆에서 보면은 또 길이 보여. 

그래서 훈수를 둬.  그럼 훈수 두지 말라고 해.

그게 중요한 거야.

보면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몰라. 근데 옆에서 보면 보여. 길이. 

이렇게 하면 되는데.. 근데 그걸 가르쳐주면 안돼.

그래서, "훈수 두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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